130여년 전 조선 의사를 키워냈던 에비슨 박사의 뜻 이어 의료저혜택국가 의료인 지원, 의료자립을 돕다

연세대의료원 전경
연세대의료원과 세브란스병원 전경

연세의료원 세브란스병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현대 의료기관이다. 구한말 가난하고 척박한 땅에 에비슨 박사가 병원을 짓고, 이어 첫 국립의료기관인 제중원의 운영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세브란스 병원은 의료교육 기관으로서 최초의 한국인 의사를 길러내며 이 땅에 현대 의료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지금 이 병원은 지구촌의 다른 의료불모지에 의료자립을 위한 사람 세우기를 진행하고 있다. 마치 130여년 전 이 땅에 에비슨 박사가 그랬던 것처럼.

에비슨 박사 내한 100년에 맞춰 시작된 해외선교활동 … 의료저혜택국가 의사 270여명 초청 연수

세브란스병원 내에는 국내외 의료선교활동을 도맡아 진행하는 의료선교센터가 존재한다. 국내 활동도 적잖지만 눈에 띠는 해외 활동이 다양하다. 해외 선교라고 하면 보통 나가 전도를 하고 집이나 학교, 병원 등을 지어주는 봉사활동을 연상한다. 그 곳에 멋진 간판을 달아 이름을 알리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의료선교센터의 박진용 소장은 “우리는 눈에 보이는 건물과 병원이 아니라 사람을 세운다”고 말했다. 130여년 전 에비슨 박사가 세운 가장 큰 것은 세브란스라는 병원이 아니라 사람, 즉 의료자립을 이룰 수 있는 의료인이었다는 철학이 바탕에 깔려있다. 박 소장은 “우리가 가장 가치를 크게 두는 것은 사람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을 세운다는 목표는 의료 기반이 약한 국가의 의료자립을 위한 학구적인 도움과 지원으로 발현됐다. 그 지역 의료인의 능력을 향상시키면 그만큼 의료자립이 빨라지고, 소중한 생명을 더 많이 지켜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같은 의료선교센터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에비슨 박사가 한국에 온 지 딱 100년이 되는 1993년부터다. 사랑과 헌신을 베푸는 기독교적 사상에 더해 100년 전 받은 것을 이제 다시 돌려주자는 의미였다.

첫 시작은 몽골이었다. 1994년 세브란스병원은 울란바토르시와 합작으로 연세친선병원을 개원하였다. 1993년부터 몽골국립의과대학과 MOU를 맺고 학술교류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몽골국립의과대학의 교수를 매년 5~7명씩 초청해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까지 연수를 진행했다. 그 기간 동안 연수 온 몽골 교수들은 새로운 의료기술을 습득하고 비전과 철학을 나누며 역량을 강화하게 된다. 이렇게 세브란스병원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간 몽골국립의과대학 교수는 20여년 동안 150여명이 넘는다.

‘에비슨 인터내셔널 펠로우쉽 프로그램’
‘에비슨 인터내셔널 펠로우쉽 프로그램’

병원을 만들고 연수 초청 대상을 몽골을 넘어 다른 의료저혜택국가 의료인으로 확대했다. 현재 25개국에서 매년 30여명의 해외 의료인이 초청을 받아 세브란스에서 연수받고 있다. 지금까지 이 프로그램을 거쳐 간 해외 의료인은 2020년말 기준으로 266명이다. 지금도 7명의 해외 의료인이 세브란스병원에서 연수 중이다.

이들에게는 PCUSA(Presbyterian Church USA, 미국장로교단) 후원으로 1인당 미화 600달러 상당의 의학교재구입도 지원된다. 원래 이 기금은 세브란스병원 설립을 후원한 미국 기업가 세브란스 가문에서 미국장로교단을 통해 전달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병원과 의료원을 위해 사용됐으나 2017년부터 이 기금도 의료저혜택국가를 위해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설립자 에비슨 박사와 후원자 세브란스의 뜻에 더 부합한다고 여긴 탓이다.

의대생을 위한 연수 및 커뮤니티 프로그램도 실시 … 전공의, 교수로 성장 후에도 지원

의사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의료 미래를 짊어진 의대생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다. 2014년에 만들어진 연세 국제보건리더쉽양성 프로그램이 그 예다. ‘United Board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 in Asia’와 에비슨의료선교 교육기금으로 한국, 몽골, 베트남, 캄보디아 학생들을 대상으로 차세대 보건리더를 양성한다. 매년 각 국가에서 5~6명의 학생들을 선발해 국제보건문제에 대해 공부하고 의견을 나누며 미래의 방향성을 탐구한다. 이를 통해 범국가적인 보건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이끌어갈 리더를 키우는 게 목표다.

‘프로젝트 에비슨 10X10’
‘프로젝트 에비슨 10X10’

보다 본격적인 해외 의대생 초청 연수 프로그램도 있다. 2019년부터 시작된 ‘프로젝트 에비슨 10X10’이 그것이다.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인력 양성을 위해 의료저혜택국가 의대생을 선발, 이들이 교수로 성장할 때까지 지원한다.

10년 동안 매년 10명의 의대생을 선발하는데, 이들은 학생 때 1번, 전공의 때 1번, 그리고 교수가 돼서 또 1번, 이렇게 총 3번에 거쳐 세브란스 병원에서 연수를 받게 된다. 의대생 때는 철학과 비전을 공유하고, 전공의 때는 의료 역량을 향상시키며, 교수가 돼서 함께 연구하며 각 국가의 의료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파트너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사실 병원에서는 처음에는 학생들의 연수를 반기지 않았다. 의대교수와 달리 당장의 효과도 나오지 않고 짧은 시간에 무엇인가를 배우기엔 역량도 부족하다 여겼다. 하지만 세브란스병원의 이비인후과 교수 1명이 자비로 초청한 케냐 의대생 4명의 눈빛을 보고 생각을 달리했다. 센터의 최원규 교수는 “교수가 된 후에 배움보다 학생 때 접하는 비전이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안타깝게 코로나19로 인해 9명 밖에 초청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곧 다시 재개돼 센터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최 교수는 “우리나라 의대생이 아니라 왜 남의 나라 의대생을 키우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이들이 성장해 자국의 의료자립을 이룬다면 130여년 전 우리가 받은 사랑을 인류에 되돌려주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위급환자를 초청해 무료 치료 …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먼저

세브란스병원의 ‘사람을 세우는 일’은 비단 의료인 육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당장 충분한 의료지원을 받지 못하는 국가의 환자를 초청해 무상으로 치료하는 해외환자 자선치료 활동도 2010년부터 꾸준히 진행 중이다.

글로리아
글로리아

매년 해외선교사, NGO, 병원 등에서 추천을 받은 환자 20~30여명을 국내로 초청해 치료하는데, 치료비와 입원비는 물론 항공비와 체류비까지 모두 지원한다.

처음에는 단발성으로 계획된 프로젝트였으나 각국에서 밀려오는 눈물겨운 사정들을 외면하기 힘들어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게 됐다.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센터에서 최근 기억에 남는 환자는 작년 5월에 치료받은 남수단의 4세 소녀다. 아이는 2.5cm의 쇳조각을 삼켰는데 이것이 기관지를 뚫고 대동맥궁 근처에 자리 잡은 위험한 상태였다.

문제는 당시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대부분의 병원 문턱이 높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진용 소장은 당시를 “아이를 포기하면 병원은 안전했겠지만 아이는 분명 생명을 잃게 된다”고 회상했다. 쉽지 않은 결정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이병석 전 병원장이었다.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의료인의 사명이라며 그는 흔쾌히 글로리아의 입원을 허락했고 덕분에 아이는 생명을 구했다.

코로나로 인해 글로리아 이후로는 환자 초청이 미뤄지고 있지만 올 7월부터 다시 의료사각지대의 해외환자들이 초청될 예정이다. 아이티 환아 2명, 필리핀 환아 1명이 입국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에게 세브란스병원의 초청은 생명줄과 같다.

짧은 역사 속에서 이룬 커다란 발전, 원동력은 사람 그리고 파트너

세브란스병원은 나아갈 길을 과거에 비추어 정하고 있다. 박진용 소장은 “연수를 다녀간 학생 중에서 가끔 처음 세브란스병원의 사진을 보며 어떻게 130여년 만에 이렇게 큰 발전을 이뤘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며 “그럴 땐 6.25때 불타 골조만 남았던 병원의 사진을 보여주며,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고 도와줄 수 있는 파트너가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해준다”고 밝혔다. 이는 지금 세브란스병원이 국내에서 그리고 국외에서 무엇보다 인재를 육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다.

세브란스병원은 지금까지의 활동에 멈추지 않고 또 다른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올해부터 시작되는 ‘세브란스 원 패밀리 프로젝트’다. 지금까지 세브란스병원을 거쳐 간 500여명의 의사와 의대생들이 의료 발전의 비전을 공유하며 각자의 국가에서 이를 재생산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맺고 후원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이 중심이 되어 그 지역에 비전을 퍼트리고, 높은 의료기술을 펼치도록 하는 게 세브란스병원이 의료선교센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다.

저작권자 © 헬스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