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정의학과의원이상훈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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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은 걸 성취했는데, 결국은 이룬 것이 없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한 말이다. 처칠은 영국인들에게 희대의 천재문학가 세익스피어 보다도,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 보다도 위대한 인물로 기억된다.

2002년 BBC는 시청자 3만 명을 대상으로 ‘위대한 영국인 100명’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 결과 처칠이 수많은 역사 인물을 제치고 랭킹 1위에 올랐다. 28.1% 시청자가 그를 최고의 인물로 꼽았다. 그는 영국인에게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다. 국가를 수호한 위대한 인물이다. 그래서일까. 국가적 어려움이 있을 때 영국 언론은 ‘처칠은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라는 유형의 기사를 간헐적으로 쓴다.

그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은 유명 정치인이다. 뛰어난 리더십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다. 공포에 맞서 싸워 이긴 승리자다. 처칠은 위기 대처 철학을 다음처럼 말했다.

“위기 상황에서 절대로 도망치지 말라. 물러서면 위험이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러나 결연하게 맞서 싸우면 위험은 절반으로 준다. 어떤 일이 닥쳐도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 절대로!”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승리한 처칠은 총리를 두 번이나 지낸 거물이다. 명연설과 탁월한 유머 감각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처칠은 예측을 깨는 사나이, 연구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처칠은 정치인 외에도 다양한 각도로 살필 수 있다.

첫째, 그는 화가였다.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 해군장관이었다. 그러나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군이 참패를 당한 뒤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로 인해 생긴 우울감을 잊고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풍경화를 그렸다. 그림 수준은 아마추어를 넘어섰다. 피카소가 전업 작가로도 충분하다고 할 정도였다. 2015년 경매에서 한 작품이 30억원에 팔렸다.

둘째,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처칠은 1953년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세계적 문호인 헤밍웨이를 제치고 안은 영광이다. 인세는 삶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액수였다. 요즘 금액으로 치면 약 2,000만 달러의 거금이다. 처칠은 귀족 집안 출신이지만 씀씀이가 헤픈 데다 도박도 해 늘 돈에 쪼들렸다. 사업가들의 도움으로 경제 생활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의 경제력은 인세로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셋째, 그의 총리 취임을 국왕이 싫어했다. 처칠이 1940년 처음 총리가 될 때 나이는 66세였다. 당시 영국 등 유럽의 분위기는 팽창하는 독일을 두려워했다. 독일에게 양보하고, 히틀러를 달래서 공존하고 싶어했다. 처칠은 이에 대해 나치 독일의 야망을 계속 경고했다.

결국 1940년 5월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사임했다. 이 자리에 영국민들은 처칠이 앉기를 원했다. 그러나 국왕 조지 6세도, 사임하는 체임벌린도, 집권 보수당 동료들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야당인 노동당과 민주당 그리고 공무원과 군인들이 처칠을 지지했다.

이 같은 이색 경력의 처칠은 의사인 필자에게도 건강 차원에서 흥미로운 인물이다. 우울증 극복과 식생활 그리고 건강 유지다. 그는 우울증을 앓았다. 이는 집안 내력이었다. 재무장관을 지낸 아버지가 우울증으로 삶을 달리했고, 자녀도 알코올에 빠지는 등 일반적이고 평범한 삶에서 거리가 있었다.

처칠은 우울감을 '평생 따라 다니는 검은 개(블랙독)'로 불렀다. 우울증을 친구로 대하며 살았다. 그가 하원의원에서 물러난 89세 황혼에는 기력 쇠약과 함께 우울한 감정에 빠지곤 했다. 그는 울적할 때 “내가 많은 것은 이루었는데, 지금 보면 이룬게 없다”고 탄식하곤 했다.

그러나 처칠은 우울감에 무너지지 않았다. 우울감을 뛰어넘는 열정으로 일에 매진했다. 그 결과 90세까지 장수했다. 또 그는 엄청난 대식가다. 처칠은 아침부터 고칼로리 음식을 섭취했다. 식탁은 달걀, 구운 고기, 시리얼, 베이컨, 토스트, 치즈에다 홍차로 꾸며졌다. 왕성한 식욕은 80대까지도 계속됐다.

여기에 습관적으로 독한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았고, 독한 위스키를 곧잘 물 마시듯 했다. 그는 음주에 대해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는 말도 했다. 게다가 별다른 운동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몸은 점점 불었다. 비만은 심혈관질환 등 대사질환 위험을 높인다. 처칠은 78세에 뇌졸중으로 왼쪽 몸이 마비될 때까지는 큰 이상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중년부터 심혈관 질환을 앓았다. 처칠은 1945년 전쟁 후의 국제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얄타에서 회담했다. 당시 3명의 정상은 모두 심혈관 질환이 있었다. 병세가 회담의 결과에 약간 영향을 주었다는 시각도 있다.

비록 윈스턴 처칠이 90세까지 장수했지만 완전한 건강체는 아니었던 셈이다. 선천적으로 강한 체질인 그가 운동과 식단 관리로 비만에서 벗어나고, 금연과 절주를 했다면 세계의 역사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글 : 삼성가정의학과의원 이상훈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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